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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3-06-0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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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스님의 고녕가야 이야기] 단재 신채호와 두계 이병도

기사입력 2022-07-2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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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신채호(1880~1936)는 함창고녕가야에 대한 다양한 고증을 보여주었고 두계(斗溪)이병도(1896~1989)는 밭 갈던 소도 웃을만한 이유를 들어 함창고녕가야를 부정했다.
 

우리 사회에 두계의 입김이 세어서인지 지금도 함창고녕가야는 진흙속에 묻혀있다. 지금은 공검면소재지가 되었지만 오랜세월 함창에 속했던 공갈못에 가면 못 옆에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학예안내인으로 채순철씨가 근무하며 친절하고도 열정적으로 공갈못과 함창을 선양한다. 박물관 전시장을 가만히 둘러보면 유리창 너머 전시장에 단재의 저서인 조선상고사가 누렇게 바랜 모습으로 펼쳐져있다.

 

단재는 고녕가야가 고닝가야로 변했으며 다시 공갈로 음운이 변했다고 한다. 고녕이나 고닝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야는 들판, 고을이라는 의미로 합쳐서 큰 고을 혹은 큰 들판이 있는 고장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이두와 구결을 동원해서 고녕이 고닝으로 다시 공으로 변하는 양상 그리고 가야가 가라로 변하고 다시 갈로 변하는 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두의 변화나 음운의 변화과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녕 고닝 공, 가야 가라 갈로 변화했다는 의미는 이해할 듯하다. 단재는 공갈못이 고녕가야와 한 몸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두계 이병도의 견해는 소개하기 민망할 만큼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인다. 일본식민지 감독의 휘하에서 주류로 살아가는 처신으로 곡학아세하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번역했다. 일제 강점기 보성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귀국하여 중등학교 교사를 7년간 근무했다. 그 후 총독부 관할하에 있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광복될 때까지 활약하였다. 단재가 만주벌판과 시베리아의 혹한을 헤치고 역사의 갈래를 잡으며 독립투쟁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다.

 

두계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번역에 있어 별 하자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가 해석하는 모양은 마치 고등수학자가 사칙연산을 잊어버린 듯한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술 취한 선비가 자기 집을 잊어버리고 길거리에 헤매는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말인즉 사기 지리편에 󰡐고녕군은 고녕가야국에서 출발했으며 그 아래 3개의 속현을 두고 있으니 가은, 문경, 호계󰡑라고 적시했다. 고녕군이 함녕이 되었다가 함창으로 변하는 내력과 가은, 문경, 호계가 천년을 두고 지명이 변화한 내력을 상세히 적고 있다.

 

한편 유사5가야조에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 고녕가야는 지금의 함녕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사, 야사 양사에 반듯이 적혀있고 유물유적이 강바닥에 돌처럼 널려있는데도 고녕가야는 함창이 아니고 진주인 듯하다고 진주를 주사위 던지듯 낙점했다. 그것은 나가 미찌오 등 일본식민사학자들이 앵무새처럼 읍조리던 구절이다. 그에 발맞추어 어중이 떠중이 학자교수라는 자들이 눈 먼 망아지 봉사 요령소리 따라 가듯 지금까지 쫄래쫄래 따르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다. 막상 진주에 가서 물으면 누구도 진주고녕가야를 주장하는 사람은커녕 아는 사람도 없다. 필자가 지난해 김길수 진주문화원장을 찾아 면담했지만 그 역시 진주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금시초문이라면서 내가 가져간 서류를 복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풍찬노숙을 하면서 천하를 떠돌던 단재는 끝내 이국땅에서 옥사를 하였다. 우리의 상고사를 찾아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자는 마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단재는 그렇게 함창에서 고닝가야와 공갈못을 증언하고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정한론(한국정벌론) 실행을 위해 임나일본부 논리를 만들려고 총독부 촉탁 교수로 활약한 나가통세는 함창고녕가야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함창고녕가야 뿐 아니라 금관가야나 신라, 백제마저 초기 기록은 말살하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나라를 빼앗았고 촉탁들을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는데 못할 것이 없다고 결심한 것이다. 고대 남한땅에 강대한 세력이 건재했다면 임나일본부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식민지학자 입을 빌려 함창고녕가야를 없애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함창의 고녕가야는 경상도서북부에 위치해 있으므로 여타가야와의 거리가 멀어 가야연맹에 집어넣기는 무리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에 조선총독부 소속의 이병도 수사관보는 스승 나가통세의 이론에 한발 더 나아가 함창대신 아예 진주를 고녕가야의 터전으로 교체했다. 옛 이름도 비슷하고 지리산을 끼고 산나물도 많이 나고 일본과 교행이 쉬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렇게 정했다. 역사가 희곡도 아니고 누가 낙점한다고 해서 함창이 진주가 되고 철수가 영희가 될 수 있다는 해괴한 사고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 함창고녕가야 역사는 그렇게 도박판의 판돈처럼 이사람 손에 들어갔다가 저 사람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노름꾼들의 손아귀에서 화톳춤을 추고있는 형국이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예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들을 한국남부지방에 매김하여 고대에 그러한 소국이 있어 그곳을 야마토 왜가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를 만들어내었다. 지금도 그들의 아바타로 자처하는 식민사학자들은 야금야금 우리의 강토를 야마토 왜의 속국으로 집어넣고 있다. 비굴한 웃음을 얼굴 가득히 지으면서 말이다.

 

자고로 역사학은 국가의 근간이고 역사학자는 그 나라의 간성이다. 총칼을 들고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와 장군은 그들의 의사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확립해서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바람막이에 불과하다. 그만큼 역사와 역사학자의 역할은 국가안의 어느 단체나 개인보다 앞선다. 지금처럼 우리의 역사를 격하시키고 타국의 식민사관에 종속시키는 반역행위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에 부역하는 저들은 뻐꾸기의 탁란(托卵)과 조금도 다름없는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 뻐꾸기 탁란처럼 교묘히 속이고 기생하면서 우리의 둥지인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동북공정이나 임나일본부 지역비정에 대해서 반발은 커녕 묵인하고 동조한다. 용서도 용납도 할 수 없는 반민족, 반국가 반역행위로써 반드시 이 나라에서 징치해야할 대상들이다. 함창고녕가야역사를 회복할 때 대한민국은 웅지를 펴고 비로소 비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정 스님 약력]

1965년 경북 영덕 출생

1985년 문경 봉암사 출가

서암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법주사 승가대학 졸업

실상사 화엄 학림 졸업

전국 선원 10하 성만

예천 장안사 주지(역임)

김천 직지사 교무 시무

) 봉천사 주지

 

상주문경매일신문 (smi3700@daum.net)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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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지혜
    2022- 07- 31 삭제

    동북공정과 임나일본부에 부역하는 저들은 뻐꾸기의 탁란(托卵)과 조금도 다름없는 이적행위를 하고 있다. 뻐꾸기 탁란처럼 교묘히 속이고 기생하면서 우리의 둥지인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 동감입니다~~ 가짜는 꺼져라!!!

  • 강범석
    2022- 07- 31 삭제

    함창출신으로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장터 남쪽에 가야왕비릉도 있고... 어릴 때부터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깊은 탐구로 우리 역사를 바로세웠으면 합니다

  • 김민곤
    2022- 07- 22 삭제

    고맙습니다. 식민사학자 죄업을 징멸하고 왜곡 조작한 우리 겨레 역사를 되살려 만대에 전합시다.